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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사용자와의 대화가 ‘불법’이었던 나라

"이제 '침묵' 대신 '대화', 하청 노동자 목소리가 비로소 법의 보호를 받게 됐다"

[데스크칼럼]사용자와의 대화가 ‘불법’이었던 나라 - 산업종합저널 정책
같은 헬멧을 쓰고, 같은 작업복을 입고, 같은 먼지를 마시는데 한쪽은 말을 걸면 불법이 된다. 이 나라에서는 오랜 시간 하청 노동자가 원청 사용자에게 말을 거는 일, 대화를 요청하는 일이 ‘법 위반’이었다. 2024년 7월, 국회 환노위를 통과한 노조법 2·3조 개정안은 그 당연한 권리를 처음으로 제도 안에 넣었다. 그건 조용한 혁명이었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이 법을 ‘진짜 성장의 법’이라 불렀다. 감상적인 수사는 아니다. 이제부터는 하청 노동자의 교섭 요구를 원청이 ‘듣고도 모른 척’할 수 없게 된다.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마땅히 책임도 져야 한다. 그동안 공사장 비계에서 추락한 이의 죽음은 하청의 관리 부실로 분류됐고, 원청은 관리감독에 소홀했다며 벌금 몇백만 원으로 끝났다. 이제 그런 식의 책임 회피는 어려워진다. 위험의 외주화에 법이 첫 브레이크를 건 셈이다.

쟁의행위와 손해배상의 문제도 변화했다. 파업을 하면 개인당 수억 원대 손해배상 청구가 날아오던 구조였다. 겁에 질린 조합원들은 점점 말이 없어졌다. 침묵은 권리를 보호하지 못했다. 개정안은 책임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면서, 말 그대로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되찾아줬다.

이 변화는 산업의 이익을 해치지 않는다. 오히려 글로벌 통상 기준에 가까워지는 일이다. 유럽연합은 ILO 협약 비준을 FTA 이행 조건으로 걸었고, 노동기준 미달은 덤핑으로 간주한다. 노동권은 인권이자, 이제는 수출의 조건이기도 하다. 공급망 리더십은 수직이 아니라 수평에 있다는 말은 진부하지만 여전히 유효하다. 하청 노동자의 조건이 곧 품질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현장은 혼란스럽다. 교섭창구는 어디로 단일화할 것인가, 사용자 판단 기준은 누가 정할 것인가. 6개월의 유예기간이 허투루 지나가면, 법은 현실에서 공중분해된다. 정책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제도 변화는 제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교섭의 출발은 말 거는 것이다. 이제 그 말이 불법이 아니게 됐다. 사람다운 일이 하나 법에 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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