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적화된 투명한 실리콘과 기존 실리콘 비교(上) 이미지와 PECVD 증착 중 도펀트 조절을 통한 흡수율 조절 성과 그림(下)
실리콘(Silicon)은 전자회로의 절대 군주였지만, 광학(Optics)의 영역에서는 늘 ‘불청객’ 취급을 받았다. 전기는 잘 통하게 할지언정, 빛은 가차 없이 흡수해버리는 검고 탁한 성질 탓이다. 때문에 인류는 수백 년간 투명하지만 무겁고 가공하기 힘든 ‘유리’를 깎아 렌즈를 만들었다. 이 견고한 고정관념에 균열이 생겼다. 검은 실리콘이 투명한 옷을 입고 광학의 중심으로 진격한다.
한국연구재단은 포항공과대학교(POSTECH) 노준석 교수 연구팀이 실리콘의 굴절률은 유지하되 가시광선을 투과시키는 획기적인 공정 기술을 개발했다고 23일 밝혔다. 이는 단순한 신소재 개발을 넘어, ‘깎아서 만드는’ 렌즈 산업이 ‘찍어서 만드는’ 반도체 산업으로 편입됨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메타렌즈(Metalens)는 빛의 파장보다 작은 나노 입자를 배열해 빛을 굴절시키는 평면 렌즈다. 이론적으로는 완벽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굴절률이 높은 소재는 불투명하고, 투명한 소재는 굴절률이 낮다는 ‘광학의 딜레마’ 때문이었다. 실리콘은 전자에게는 고속도로였지만 빛에게는 늪이었다.
연구팀은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원자 단위의 레시피를 다시 썼다. 반도체 양산의 핵심인 ‘플라즈마 강화 화학 기상 증착(PECVD)’ 공정을 활용해 실리콘 원자의 결합 구조를 인위적으로 재설계했다. 열 대신 플라즈마 에너지를 가해 수소와 산소의 배합을 조절하자, 검은 실리콘이 거짓말처럼 투명해졌다.
결과는 놀라웠다. 개발된 ‘투명 실리콘(a-Si:H)’은 가시광선 영역에서 유리에 버금가는 투명도를 보이면서도 빛을 90도 가까이 꺾어버리는 고굴절 특성을 유지했다.
데이터는 이 기술이 실험실의 유희가 아님을 증명한다. 투명 실리콘으로 제작한 메타렌즈는 적색광(635nm) 영역에서 97.0%, 녹색광(532nm)에서 92.0%의 변환 효율을 기록했다. 빛의 손실이 거의 없는 ‘완전 투과’에 가까운 수치다. 여기에 산소를 배합한 실리콘 산화물(a-SiOx:H)은 프리즘처럼 빛의 색깔(파장)을 분리하는 기능까지 수행한다. 붉은색은 굴절시키고 파란색은 통과시키는 이 기술은 하나의 칩 안에서 다양한 광학 처리가 가능함을 시사한다.
산업계가 주목하는 지점은 성능보다 ‘공정’이다. 기존의 메타광학이 값비싼 특수 소재나 복잡한 공정에 의존했다면, 노준석팀의 해법은 이미 전 세계 반도체 공장에 깔려 있는 PECVD 장비를 그대로 이용한다. 추가 설비 투자 없이 당장이라도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이는 곧 스마트폰 뒷면의 흉물스러운 ‘카툭튀(카메라가 툭 튀어나온 현상)’와 목을 짓누르는 VR 헤드셋의 무게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 있음을 예고한다.
노준석 교수는 “실리콘은 렌즈가 될 수 없다는 통념을 깨고 소재의 한계를 공정으로 극복했다”고 자평했다. 그의 말처럼 이제 렌즈는 깎는 것이 아니라 반도체처럼 쌓아 올리는 것이 됐다. 검은 돌(실리콘)이 투명해지는 순간, 광학 산업의 판도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연구 결과는 지난 14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Science Advances)’에 게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