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원전을 친환경 에너지로 분류한다고 밝히면서, 한국형 녹색분류체계인 K-택소노미가 사실상 국내용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지난 6일 유럽의회는 녹색분류체계(Taxonomy, 이하 택소노미)에 원자력을 포함하는 안을 가결했다. 그 동안 원전의 친환경성을 두고 유럽 내부의 찬반 논쟁이 이어졌지만, 결국 ‘과도기적 에너지로’ 인정한 것이다.
한국 정부로서는 기쁜 소식이다. 원전이 친환경 에너지라는 윤 대통령 주장에 힘을 실어줄 만한 이야기가, 그것도 환경 분야에서 세계 기준이나 다름없는 유럽에서 공식화했기 때문이다.
지난 18일 한화진 환경부 장관이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원전을 K-택소노미에 포함하겠다고 밝히면서, 한국 원전은 친환경 대열에 합류했다.
다만, 유럽연합의 원전 허용에는 몇 가지 조건이 달려있다. ▲2045년 이전까지 건설 허가를 받아 유럽 내에 건설한 원전 ▲2025년부터 사고 저항성 핵연료 사용 ▲2050년까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리장을 완공해 운영하기 위한 세부 계획 보유 등의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이에 관해 한화진 환경부 장관은 “EU처럼 ‘사고 저항성 핵연료 적용’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건설’ 등 안전기준을 적용하겠다"며 수용 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도 "우리 기준에 맞추겠다"는 여지를 남겼다.
EU의 까다로운 기준, 현재 한국 원전은 충족할까
에너지전환포럼의 석광훈 전문위원은 EU의 조건에 비췄을 때 한국 원전은 달성하기 어려운 조항들이라고 진단했다.
지난 22일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윤석열 정부의 친원전 정책 이대로 괜찮은가?' 토론회에서 석광훈 전문위원은 "우리만 사용하는 (택소노미)조건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이같이 비판했다.
사고저항성 핵연료(ATF) 적용은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는 분석이다. 사고저항성 핵연료란 원전의 안전성을 강화하기 위해 고안된 핵연료다.
석 전문위원은 “ATF 기술에 앞서 있는 미국도 당초 2025년 상용화에서 2030년으로 수정했다”라며 “이마저도 상용화가 불투명하다”라고 했다.
기존 핵연료 제조공정과 설비를 변경해야 하는 등 투자위험도 크고, 새로운 핵연료 개발은 새로운 종류의 원전 개발에 버금가는 수준의 비용이 든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현재 한국수력원자력은 ATF 상용화 시점을 2034년으로 전망하고 있다. 22일 본지 기자와 통화한 한수원 관계자는 “해당 시점도 최대한 앞당긴 수준이다”라며 “제조공정 설비 추가와 코드체계 갱신 절차 등을 모두 거쳐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소요 비용에 대해선 아직 구체적으로 정한 바 없다고 했다.
고준위방폐장 운영계획도 사실상 힘들다는 설명이다. 석 전문위원은 "세계서 유일하게 처분장을 갖고 있는 핀란드나 스웨덴도 반세기나 걸린 사업이다"면서 "게다가 한국은 인구 밀도가 높아 이들보다 (건설에)불리한 조건을 갖고 있다"고 했다.
주민 수용성 문제도 걸림돌이라는 지적이다. 앞서 스웨덴과 핀란드가 원전 인접 지역에 방폐장 부지를 선정한 이유도 주민 수용성에 부딪힌 것인데, 국토 면적이 더 좁은 한국에서 수용성 해결은 더 힘들 것이라는 설명이다.
최근 산업부는 2059년 내에 방폐장 건설을 마무리 짓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한국의 방폐장은 지난 40년 동안 주민 반발에 부딪혀 답보에 있고, 산업부의 세부안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다.
K-택소노미, ‘친환경’인가 ‘투자’인가
사실상 결정권은 환경부 손에 달려있다. 국내 원전 업계 상황을 고려해 관대한 조건을 내걸 지, 친환경 경제 견인이라는 택소노미 본래 의미에 충실할 것인 지가 쟁점이다.
다만, 윤 대통령이 원전에 힘을 싣는 기조에서 환경부가 독립적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지는 우려가 되는 대목이다.
여기에 지난 21일 산업통상자원부가 원전 업계와 K-택소노미 관련 의견 청취 간담회를 열고, 이를 환경부 등 관계부처와 적극 협의할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했는데, 다른 부처로부터 일종의 ‘러브콜’을 받은 환경부의 입장은 더욱 위태로워 보인다.
지난 22일 본지 기자와 통화한 환경부 관계자는 “정부의 친원전 정책이 K-택소노미에 영향을 줄 수 있지 않나”라는 물음에 “정부의 정책 방향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다”라고 답했다. 녹색 분류체계의 본질적 의미가 퇴색되는 것 아니냐고 묻자 “반대와 찬성의 이견이 큰 상황이다”라며 양쪽 의견을 종합해 정리할 것이라고 전했다.
정부의 친원전 기조와 환경적 가치판단을 두고 환경부 내에서도 고심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환경부가 어떤 방식으로 의견을 수렴해 나갈 지는 아직 뚜렷하게 정해진 바는 없다. 관계자는 “의견 수렴 절차는 아직 미정이다”면서 “추후 기회가 되면 당연히 (공청회)형식 절차를 밟아야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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