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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기획] “기술을 지켰다면, 사업은 무너지지 않았다”

기술탈취와 싸우는 사람들, 그리고 여전히 먼 '공정성장'

기술을 빼앗겼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그는 너무 늦었음을 깨달았다. 함께 개발하자며 도면을 요청한 상대는, 이후 연락을 끊었고 몇 달 뒤 유사한 제품을 출시했다. 계약서에는 권리 귀속 조항이 없었고, 그가 증거라고 주장한 파일은 상대 기업의 서버에 있었다. 법원은 입증 부족을 이유로 패소 판결을 내렸다. 사업은 문을 닫았다.
그는 “기술이 아니라 시간을 도둑맞은 것”이라 말했다. 그 시간이란, 창업 후 6년 동안의 모든 것이었다.

기술탈취. 피해자에게는 생존의 위협이고, 산업 전체에는 신뢰의 붕괴다. 정부는 이 악순환을 끊기 위해 9월 10일 '중소기업 기술탈취 근절 방안'을 발표했다. 제도 개선의 골자는 증거 확보 절차를 강화하고, 손해배상 체계를 현실화하며, 예방 중심의 보호 시스템을 확대하는 것이다.

현장에서 벌어지는 문제와 제도 간의 간극은 과연 줄어들 수 있을까.
기술탈취의 가장 큰 문제는 피해자가 그 피해를 '입증'해야 한다는 데 있다. 법적 다툼은 곧 '기술을 훔친 쪽보다, 빼앗긴 쪽이 더 많은 자료를 내야 하는' 게임이다. 이에 정부는 ‘한국형 증거개시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법원이 지정한 전문가가 현장을 조사하고, 불리한 자료 삭제를 막기 위한 자료보전 명령제도도 추진된다.

하지만 새로운 제도의 시행 이전에 마주할 문제는 강제력의 한계와 권한 분산이다. 조사 과정에서 해당 기업이 자료 제출을 거부하거나 삭제할 경우 강제할 수단은 여전히 부족하다. 법원, 행정부, 수사기관 사이의 자료 공유도 제한적이다. 관계기관 간 협조 체계와 법적 근거 마련이 병행되지 않으면, 제도는 선언에 그칠 수 있다.

[심층기획] “기술을 지켰다면, 사업은 무너지지 않았다” - 산업종합저널 동향

손해배상의 ‘현실화’가 넘어야 할 현실
실제로 인정되는 손해배상 규모도 문제다. 한 자료에 따르면 기술침해 관련 소송에서 피해자가 청구한 금액 대비 실제 배상액은 평균 17% 수준에 머물렀다. 8억원의 피해를 주장해도, 실제 받는 금액은 1억 원 남짓이라는 뜻이다.

이번 대책은 개발에 투입된 비용도 손해액으로 인정하고, 유사 R&D 데이터를 활용해 객관성을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손해액을 산정하는 전문기관도 확대된다. 다만 이러한 노력들이 실효성을 가지려면, 산정 기준의 투명성, 기관의 독립성, 법원의 신뢰도 확보라는 전제가 함께 따라야 한다.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전문가의 의견서가 법정에서 ‘정확한 계산’이 아닌 ‘참고 의견’으로 취급될 수 있다는 점이 여전히 부담이다.

정부는 기술임치 건수를 확대하고, 원본증명 서비스의 범위를 늘리며, AI 기반 유출방지 시스템까지 지원하겠다고 했다. 중소기업이 ‘미리’ 기술을 보호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해주겠다는 방향은 명확하다.

그러나 다수의 중소기업은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못 한다”고 답한다. 기술임치나 증거보전의 개념 자체를 접한 적 없는 기업도 많다. 정책의 방향은 옳지만, 접근성과 지속성, 즉 ‘몰라서 못하는’ 기업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단순 지원책을 넘어서, 기술보호 교육과 인식 개선, 사전 상담 시스템의 상시화가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탈취는 범죄, 그러나 신고는…
현행 법체계에서 기술탈취는 불공정거래이거나 민사상 손해배상의 대상이다. 형사 처벌로 이어지기 위해선 ‘영업비밀 침해’에 해당해야 하고, 그 요건도 까다롭다. 신고 후 발생할 수 있는 거래 단절, 평판 훼손, 시장 내 보복은 대부분의 피해기업이 ‘침묵’을 택하게 만드는 이유다.

정부는 이를 위해 ‘중소기업 기술신문고’를 운영하고, 범부처 대응체계를 구축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보호조치, 예컨대 신고 기업의 신분 보장, 제보 이후 거래선 보호, 조사 기밀 유지에 대한 언급은 구체적이지 않다. 사회 전체가 기술탈취를 ‘도둑질’이 아닌 ‘기술 유사성 문제’로 보는 인식도 여전히 존재한다.

정부가 내놓은 이번 대책은 분명 ‘가장 촘촘한 대응’에 가깝다. 증거 확보, 손해 산정, 예방 시스템, 사후 지원까지 거의 전 영역을 포괄한다. 문제는 그것이 현장에서 ‘작동할 수 있는가’, 그리고 ‘신뢰받을 수 있는가’다.

기술탈취를 근절한다는 것은 단지 법을 고치는 일이 아니다. 산업 생태계에서 중소기업이 "제 기술을 지키겠다"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 그리고 그 말을 법과 제도가 지켜주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실효성은 문서에서 입증되지 않는다. 기술탈취 문제의 실체는 계약서 너머의 시장구조, 약자에 침묵을 강요하는 산업문화, 기술은 제품이 아니라 신뢰라는 점을 잊은 정책 설계 그 자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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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운 기자 기자 프로필
김지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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