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전쟁이 한 달 이상 이어지면서 정부가 원유 자원안보 위기경보를 사상 처음으로 ‘경계’ 단계로 올렸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중동산 원유 도입 항로가 막히자 대체 공급선 확대와 비축유 활용 등 총동원 체제에 돌입했지만, “위기는 뉴스가 아니라 현장에서 이미 한계선을 밟고 있다”는 중소기업의 호소가 잇따르고 있다.
사상 첫 ‘경계’…“뉴스가 남 얘기가 아니었다”
정부는 1일 제5차 자원안보협의회를 열고 원유 자원안보 위기경보를 ‘주의’에서 ‘경계’로, 천연가스는 ‘관심’에서 ‘주의’로 2일 0시부로 격상했다. 국가자원안보특별법에 따른 위기경보 4단계(관심–주의–경계–심각) 가운데 원유에 대해 사상 처음 ‘경계’가 발령된 것이다.
배경은 분명하다. 지난달 1일 호르무즈 해협 봉쇄 직전 통과한 유조선이 20일 국내에 입항한 이후, 열흘 넘게 호르무즈발 원유 도입이 사실상 중단됐다.
중동 지역 생산·수송시설을 겨냥한 공격이 이어지며 국제 유가 변동성이 커지자 정부는 경계 단계 발령 기준이 충족됐다고 판단했다. 천연가스 역시 카타르의 불가항력 선언 이후 현물 가격 급등이 전력·난방요금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선제적으로 ‘주의’ 단계로 상향했다.
수도권에서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한 중소 제조업체 대표는 “원유 경보가 ‘경계’까지 올라갔다는 뉴스가 남 얘기가 아니더라고요. 운송비·원자재 값이 한꺼번에 튀면서, 현장에서는 이미 한계선을 밟고 있다는 느낌입니다”라고 말했다.
UAE발 2,400만 배럴…“가뭄에 단비지만, 체감은 아직”
공급 차질에 대응해 정부는 UAE와의 긴급 에너지 협력을 통해 총 2,400만 배럴의 원유를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3월 6일 합의된 1차 600만 배럴 가운데 공동 비축분 200만 배럴은 국내 정유사 인도가 완료됐고, 나머지 물량도 3월 말부터 국내 하역이 진행되는 등 공급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어 3월 15~17일 UAE를 방문한 전략경제협력특사단이 확보한 1,800만 배럴 중, 200만 배럴은 3월 25일 여수 비축기지에 하역됐다. 피격으로 멈췄던 대체항 재가동으로 민간 정유사 계약 물량 200만 배럴도 3월 29일 선적돼 4월 중순 국내 도착을 앞두고 있다.
정부는 “원유 공급에 있어 한국이 최우선”이라는 UAE의 약속을 강조하며, 하루 소비량 기준 8~10일분에 해당하는 이번 물량이 심리적·정책적 안전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다만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국가 차원의 안전판”과 “현장에서 체감하는 비용 압박” 사이에 시간차가 존재한다. 한 부품업체 대표는 “정책적으로 2,400만 배럴을 확보했다는 건 분명 다행이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당장 다음 분기 원가·단가 협상을 어떻게 버티느냐가 더 급하다”고 말했다.
윤활유 품귀 논란에도 “출하량은 오히려 늘었다”…합동점검 착수
전면적인 비상체제는 윤활유 유통시장으로도 번졌다. 최근 일부 언론에서 자동차용 엔진오일 등 윤활유 품귀 조짐이 보도되자, 산업통상부는 1일부터 지자체·한국석유관리원과 함께 윤활유 제조·판매업자를 대상으로 범부처 합동점검에 착수했다.
정부는 윤활유가 자동차·선박·제조설비 유지에 필수적인 민생·산업 핵심 석유제품이라 공급 차질 시 일상과 생산성에 직접적인 타격이 우려된다고 본다. 산업부에 따르면 3월 기준 윤활기유 내수 출하량은 전년 동월 대비 오히려 소폭 증가한 수준으로, 기초 원료 공급에 큰 변화가 없는데도 품귀 논란이 제기돼 실태 조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합동점검단은 엔진오일 등 주요 품목을 중심으로 생산 감축·출고 제한·사재기·품질 부적합 유통 등 시장 교란 행위를 집중 점검하고, 고의적인 수급 차질 유발 행위 적발 시 엄정 대응할 방침이다.
피해 신고 471건…“장부 문제가 아니라 월급 문제”
중소벤처기업부 집계에 따르면 2월 28일부터 4월 1일 정오까지 접수된 중동전쟁 관련 중소기업 피해·애로는 총 471건에 달한다. 이 가운데 실질적인 피해·애로로 분류된 건수가 326건, 향후 피해 우려가 83건으로, 단순 문의를 넘어선 구체 사례가 빠르게 늘고 있다.
한 화장품 기업은 용기 공급업체로부터 납품 중단 통보를 받으면서 완제품 생산이 멈췄다. 기존 납품 일정은 줄줄이 지연됐고, 신규 주문 대응도 불가능해졌다. 또 다른 기업은 UAE로 선적한 화물이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인근 항에서 한 달째 묶이면서 일시 휴업에 들어갔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화물은 바다 위에 묶여 있고 물류비는 치솟은 데다 바이어 대금 입금까지 미뤄지면서, 직원 월급을 맞추는 것조차 어려운 실정이라고 토로했다.
중기부 중간 집계(3월 말 기준)에서 피해 유형은 운송 차질이 71.1%로 가장 많았고, 물류비 상승과 대금 미지급이 그 뒤를 이었다. 에너지·해운·결제 세 축이 동시에 흔들리면서, 많은 중소기업에서 “계약서상의 리스크”가 아니라 “생존 리스크”가 현실이 되는 상황이다.
단기 비축에서 구조 전환으로
정부는 위기경보 ‘경계’ 상향에 맞춰 대체 공급선 확보(UAE 긴급 물량, 비축유 스와프 방식 활용), 나프타·석유제품 수급관리(매점매석 금지·수출 제한·수입단가 차액 지원), 에너지 수요관리(공공 차량 5부제·대중교통 이용 촉진·원전 이용률 제고 등)까지 가용 수단을 총동원하고 있다.
그러나 호르무즈 해협 봉쇄와 중동산 원유 의존도가 드러낸 것은, 단기 비축을 넘어선 공급망 체질 개선의 필요성이다. 특정 지역에 치우친 원유·나프타 의존도, 도로 위주의 운송 구조, 윤활유·기초 소재의 높은 해외 의존도는 에너지와 물류가 동시에 흔들릴 수 있는 취약성을 노출했다.
결국 과제는 “얼마나 오래 버티느냐”에서 “위기 때마다 같은 고통을 반복하지 않을 구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로 옮겨가고 있다. 기초 에너지·소재의 수입선 다변화, 중소기업의 물류·에너지 비용에 대한 데이터 기반 관리 역량 강화, 피해·애로를 현장에서 곧바로 정책에 반영하는 통로가 마련될 때, 이번 중동발 충격은 한국 산업의 체질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