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스포가 있습니다.
7년간 원청업체 근무를 했지만, 돌아온 것은 권고사직이었다. 자리를 버티고 있자 하청업체로 파견 발령이 났다. 하청업체 파견직 1년을 채우면 원청으로 복직할 수 있다는 조건이지만, 말이 발령이지, 사실 제 발로 나가라는 뜻임을 안다. 그러나 내 자리를 다시 돌려받겠다는 의지로 자신을 반기지도 않고, 생전 처음 접하는 철탑 현장을 꾸역꾸역 버틴다.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이태겸 감독, 2021)의 여성 근로자 정은(유다인)의 이야기다. 원청업체 사무실에서 벽자리로 내몰리고, 인사팀장(원태희)의 언어폭력을 견디면서 결국 자신의 전문이 아닌 하청업체 파견직으로 이동하는 치욕은 이미 한 번의 해고와도 같았다.
명확한 이유가 나오진 않지만, 정은의 입장은 부조리한 상황으로 인해 자신의 자리에서 밀려나게 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억울함에 분노해도 ‘내 자리’를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은 원청에서 법망을 피해가기 위해 ‘파견’이라 말하는 핑계에 맞춰 하청에서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나 원청의 사주를 받은 하청업체 사장은 파견직으로 온 정은을 내쫓아야 하는 업무를 맡게 되고, 정은은 눈칫밥을 먹으면서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리고 인사고과 점수가 가장 낮은 하청업체의 막내(오정세)를 밀어내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청업체의 전력선 관리 업무 외에도 2개의 아르바이트를 더 하는 ‘3잡(job)러’ 막내는 세 딸을 둔 아빠이기 때문에 ‘죽음’보다 ‘해고’가 더 무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정은이 현장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고 현장 업무 과외를 자청한다. 따라가기는 힘들지만, 동료가 생긴 정은은 처음보다는 지낼만해진다.
그러나 원청에서 다시 정은을 내쫓기 위한 감사를 나온다. 감사를 나온 직원들의 요구 때문에 나선 현장에서 정은은 막내의 죽음을 마주한다.
이후 원청의 대응은 하청업체 근로자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귀찮은 일이라는 듯한 태도로 사고를 모면하기 위해 어린 세 딸에게 합의 서류를 들이민다. 분노한 정은은 죽음보다 해고가 두려웠던 막내의 마지막을 위해 철탑을 오른다.
영화는 결코 화려하거나 친절하지 않다. 마치 다큐를 보듯 현실의 부조리함과 답답함, 애환이 가득 담겼다. 산업 현장이 가지고 있는 어두운 이면들이 담담하게 또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특히, 영화의 막바지 막내의 죽음 이후 원청의 대응은 그동안의 부조리했던 각종 산업재해 사건들을 떠올리게 만들어 쓴맛을 남긴다. 현실에서 원청이 무조건적인 ‘악(惡)’이라고 할 수 없지만, 원청과 하청의 수직적인 관계는 근로자의 급을 나눈다. 급이 나눠진 근로자는 ‘죽음’보다 ‘해고’가 더 두려운 사람이 된다.
해고를 두려워했던 막내는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어버리면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세 딸만을 남겨두고 말았다. 해고로 아이들을 챙기지 못할 것을 가장 두려워했던 막내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을 뒤로한 채 스러졌다. 사고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원청의 무리한 요구에 하청 직원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은 남았다.
요즘은 산업재해가 뉴스를 통해 크게 알려진다. 안전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중대재해처벌법도 개정했지만, 원청과 하청, 근로자 모두의 안전과 이익을 챙기기에는 아직 보완해야할 점이 많다.
원청, 하청, 근로자. 각자의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다만, 작은 바람은 아직도 남아있을 수 있는 부조리한 권고사직이나, 사고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려 하지 않고 책임을 미루는 산업재해는 조금씩 사라질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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